올해 봤던 영화 중에서 가장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30초 만에 읊을 수 있을 정도로 단촐하죠. 그렇다면 승부는 연기력과 디테일입니다.
산드라 블록과 조지 클루니의 조합은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내내 고개를 갸우뚱 하게 했었습니다. 둘이 정말 어울릴까 하는 그런 생각.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둘의 상성이나 조합 자체가 우주 속의 먼지같이 의미가 없었다는 것. 저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들이 각각 우주와 어울릴까 하는 고민을 했었어야 했고,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그 누가 우주와 어울리지 않겠느냐 하고 말았습니다.
우주에서는 사람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크게 1분을 60초로 쪼개놓은 시계를 따라 초분단위로 움직이고 미팅을 잡고 밥을 먹는 지구상에서는 불편하기 그지 없을 것이지만, 느긋하게 모든 것에 유리되어 쫓기지 않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너무 당연한 곳이라면 그리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우주 속을 부유하며 천천히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는 라이언과 라디오를 들으며 천연덕스럽게 떠드는 맷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아름다운 지구. 멋진 조지 클루니도 당대의 여배우 산드라 블록도 그 멋진 광경에서는 길 가장자리 나무같은 배경이 되어버립니다. 도입부터 바로 느끼게 되는 제 3의 주인공은 눈치 채셨겠지만 그 지구가 속해있는 우주입니다.
평화로운 광경을 보며 마음이 힐링되고 있을 무렵 갑자기 폭발한 러시아 위성의 파편우에 스페이스셔틀 및 우주인들은 생과 사를 가르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생존자는 맥과 라이언 단 둘 뿐. 라이언은 딸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삶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는 상태지만, 반대로 쾌활한 맷은 낙천적인 성격의 삶에 긍정적인 인물입니다. 이 둘은 사고 후 서로 의지하며 근처 국제우주정거장으로 향하게 되는데, 맷의 추진기 연료가 떨어지거나 라이언의 산소가 떨어지면 바로 우주미아가 되거나 생명이 끊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상황 속에서 국제우주정거장으로 이동하는 뒤쪽 배경의 우주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우주인의 헤드부분을 클로즈업 하다가 우주쪽으로 패닝하여 롱테이크로 잡는 기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헤드부분의 클로즈업으로 우주인들의 표정이 말해주는 긴박한 상황을 읽으며 긴장 하다가도 우주 쪽의 롱테이크 장면으로 흐르며 너무나도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우주에 묘한 안도감을 얻게 됩니다. 이런 부분은 어떤 영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느낌이었는데, 장면도 보여주지 않는 맷의 마지막 ‘갠지스 강에 햇살이 너무 아름답다’는 그 대사부분에서도 저는 그 롱테이크의 우주를 계속 떠올리게 되더라구요.
맷과 가까스로 국제우주정거장쪽에 도달했지만, 여기서 다시 맷은 라이언과 이별을 하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의 이별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수 있는 그런 이별이 아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의 이별입니다. 라이언도 여기서 손을 놓게 되면 자신이 죽는 다는 것을 알고 있고 맷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맷은 더욱 더 라이언을 놓을 수 없겠죠. 맷은 끈을 놓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 갠지스 강에 비치는 햇살이 너무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우주정거장 앞의 보이지 않는 별의 갠지스를 사이에 두고 죽음을 대변하는 라이언은 살 기회가 있는 우주정거장으로, 삶을 대변하는 낙천적인 맷은 우주공간 속으로 관성의 법칙에 의해 천천히 움직입니다.
우주정거장 안으로 들어간 라이언은 누에고치를 빠져나오는 나비처럼 우주복을 벗고 태아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삶에 대한 의지가 없던 그녀가 다시 살아가기 위한 의지를 얻고 다시 태어나는 장면이며,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안도의 시간도 잠시 바로 우주정거장에 화재가 발생하고, 라이언은 다시 소유즈를 타고 중국의 우주정거장인 텐궁으로 갑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낙하산 끈이 이번에는 위성 파편우 속으로 라이언의 소유즈를 끌어당기죠.
겨우 파편우를 피해 텐궁으로 향해야 하는데 소유즈의 추진체가 꺼져버립니다. 다시 한번 삶을 포기하게 되는 라이언은 지구에서 온 전파 속 아닌강이라는 사람을 통해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소리와 상황으로 교감하는데요. 이 장면은 ‘아니가크’라는 영화에서 한 이누이트족이 여성 우주인과 통신하며 교감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부분의 오마주라고 합니다. 이 단편영화의 감독은 알폰소 쿠아론의 아들 조나스 쿠아론이라고 하네요.
다시 한번 고비를 넘기고 텐궁으로 향해 결국 라이언은 지구로 귀환하게 됩니다. 가라앉은 소유즈에서 바다 속으로 나온 라이언의 모습은 바로 우주에서의 그 모습입니다. 바닷 속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우주에서 보는 지구처럼 조용하고 평화스럽습니다. 자궁, 바다, 우주는 이 영화에서 절대적인 자연을 나타내는 요소들입니다. 여전히 평화스러운 바닷가지만 라이언은 첫걸음을 떼기 위해 오랜만에 만나는 중력에 맞서 몸을 일으켜야 합니다. 라이언에게 이 첫걸음은 지금까지 수없이 걸어왔던 걸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새로운 첫걸음이겠죠.
이 영화는 서로 다른 상황의 주인공들을 통해 삶과 죽음을 대비시키고, 이들의 상황에 따른 심리상태의 변화를 감각적으로 전달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여러 장면들을 만들기 위해 쓰여진 테크놀로지는 뒷쪽으로 잘 숨겨져 영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을 퇴색시키지 않습니다. 한시간반동안 한번도 ‘이 장면을 어떻게 찍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영화에 푹 빠져서 아니 우주에 푹 빠져서 감상하게 되는 ‘Gravity’. 제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영화 중의 하나 입니다.